인천은 오래된 역사유물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먼저 개항 이전까지 인천지역의 중심지였던 문학산과 계양산 일대 및 영종도 등에서 각종 신석기시대 석기류가 발견되었다.
한강 유역이 고구려의 영토가 되자 이 곳에 매소홀현(買召忽縣)이 설치되었다. 진흥왕 때는 신라의 영토가 되었으며, 757년(경덕왕 16) 소성현(邵城縣)으로 개칭되어 율진군(栗津郡)의 영현이 되었다.
1018년(현종 9) 소성현은 수주(樹州)에 속하였다. 숙종 때 소성현이 모후 인예태후(仁睿太后)의 출신지라 해 경원군(慶源郡)으로 개칭, 승격되었고, 인종 때도 모후 순덕왕후(順德王후)의 출신지라 해 인주(仁州)로 개칭되어 지주사가 파견되었다.
1392년(태조 1) 경원부가 인주로 환원되었다가 1413년(태종 13) 인천군(仁川郡)으로 개편되었다. 1460년(세조 6) 세조의 모후인 세종의 비 소헌왕후(昭憲王후)의 외향이라 해 인천군이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875년 운요호 사건 때는 영종도가 일본군함의 포격을 받아 함락되기도 하였다.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화도진(花島鎭)에서 체결되었고, 이어 한영수호통상조약과 한독수호통상조약도 이곳에서 체결되었다. 1883년 인천이 개항됨으로써 서양의 근대문물을 수입하는 수도의 관문으로서 우리나라 근대화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1895년 23부제 실시에 따라 인천부가 설치되었고, 1896년 경기도 인천부가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개항장으로 국한되고, 구인천부의 대부분과 부평군이 통합되어 부천군이 신설되었으나 1936년과 1940년의 부역확장에 따라 이 지역들이 다시 인천부에 편입되었다.
1949년 인천시로 개편되었다. 1950년 6·25전쟁 때 9월 15일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도를 회복하고 패주하는 공산군의 북상로를 차단함으로써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인천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80년 월미도 상륙지점에 표지석을 세우고, 1984년에는 송도 청량산 아래에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을 세웠다.
1963년 1월 1일 부천군 작약도가 편입되었고, 1968년 1월 1일 동 · 중 · 남 · 북구의 4개 구가 설치되었다. 1974년 제2독이 준공되어 국제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는 동시에 우리나라 공업화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1981년 7월 1일 직할시로 승격되었으며, 1988년 서구와 남동구가 신설되어 6개 구가 되었다.
1989년 1월 1일 김포군 계양면과 옹진군 영종 · 용유면이 편입되어 도시과밀화현상을 해소하고 인천 앞바다의 섬지역을 확보함으로써 해양관광시설 용지를 마련하였다. 1995년 1월 1일 광역시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3월 1일 북구가 부평구로 명칭이 변경되고 계양 · 연수구가 신설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유물 · 유적으로는 연수구 옥련동 인천광역시립민속박물관의 학익지석묘(인천광역시 기념물, 1995년 지정), 미추홀구 숭의동의 주안지석묘, 서구 대곡동의 검단 대곡동 지석묘군(인천광역시 기념물, 1995년 지정)이 있다.
인천은 원삼국시대에 미추홀(彌鄒忽)로 불렸으며 비류 십제의 도읍지이기도 하였다. 미추홀이란 이름은 물가에 있는 지역을 뜻하는 뭇골, 또는 거친 들판이 있는 지역을 뜻하는 맷골의 음차라는 해석이 있다.
고려시대의 미추홀구에 관한 구체적 사실은 확실히 알 수 없으며, 다만 인천 전체의 역사 속에서 가늠할 수 있다. 호족이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등장하였던 나말여초를 지나면서 인천 지역에서는 인주 이씨(仁州 李氏)가 대표적인 호족세력으로 대두하였다.
인주 이씨는 그 시조가 통일신라 경덕왕 때 아찬의 벼슬에 있던 이허기(李許奇)라 전한다. 고려 태조 왕건이 해상무역을 통해 성장한 기반을 바탕으로 고려를 건국하였던 것처럼, 인주 이씨 역시 해상무역을 통해 축적한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하여 고려의 대표적인 문벌로 성장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는 미추홀구가 확고한 인천의 중심지로 떠오른 시대였다. 그것은 1460년(세조 6) 이곳에 도호부(都護府)가 설치되었던 것에서 시작된다. 인주 이씨의 득세로 고려 후기에 영화를 누렸던 인천은 조선 건국 이후 인천군(仁川郡)으로 지위가 낮아졌다. 그러나 세조는 인천이 자신의 어머니이자 세종의 비(妃)였던 소헌왕후(昭憲王후)의 진외가(陳外家) 지역이라 하여 이곳을 다시 승격시켜 인천도호부로 만들었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자 정부는 개항장인 중구에 인천부의 행정을 맡는 감리서(監理署)를 설치하고 부(府) 청사의 소재지를 미추홀구 관교동에서 중구 내동으로 옮겼다. 그 뒤 1903년에는 개항장 일대만을 관할하는 부내면이 새로 설치되면서 미추홀구 지역은 수 백 년 동안 누려온 인천의 중심지 역할을 중구로 완전히 넘겨주게 된다.
이어 1914년 3월에는 부령 제111호에 따라 인천부의 일부와 부평군 전체, 남양군 일부, 강화군 도서 일부를 통합해 부천군이 신설되는데, 이때 인천부 구읍면(舊邑面)과 서면(西面)이 합쳐져 문학면(文鶴面)이 되고, 사소면과 주안면이 합쳐져 그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서 다주면(多朱面)이 생겼다. 이때 지금의 미추홀구 일대는 대부분 문학면과 다주면 일대에 속하게 된다.
관교동, 문학동, 학익동은 문학면의 일부로 들어갔고, 주안동과 도화동, 용현동, 숭의동은 다주면의 일부로 들어갔다. 그 뒤 이들 행정 구역은 여러 차례 크고 작은 변화를 겪으며 8·15광복을 맞게 된다.
1947년 4월 미군정은 인천부 주안 지청을 설치하여 도화 1동 등 9개 동을 관할하게 했다. 이것은 곧 이듬해인 1948년 8월 남동, 문학, 주안출장소 등 3개 출장소가 공식 출발하는 것으로 이어져 오늘날 미추홀의 기틀이 된다.
이들 3개 출장소는 1956년 11월 남부, 남동, 문학, 주안출장소로 분할되었다가, 1967년 3월 법률 제1919호로 「인천시 구(區)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된 뒤 1968년 1월 1일 하나로 합쳐졌으며 이때 남구가 만들어졌다.
1970년 1월 시 조례에 따라 4개 동이 나뉘어져 미추홀구는 모두 28개 행정동을 갖게 된다. 이는 인천시의 시세 확장에 따라 인구가 늘어나면서 이루어진 결과였다. 1985년 11월 인천시 조례에 따라 다시 2개 동이 분동되어 모두 40개 행정동을 거느리게 된 남구는 지역이 너무 비대해졌다는 판단에 따라 결국 1988년 1월 1일 대통령령으로 신설된 남동구에 13개 동을 떼어 주었다.
그 뒤로도 미추홀의 인구는 계속 증가하였고 인천시가 광역시로 개칭된 1995년 3월 1일에는 연수구가 신설되면서 남구에 속해 있던 8개 동이 분리되었고, 남구에는 23개 동만 남게 되었다.
제물포 개항은 인천지역사회에 또다른 시련을 가져왔다. 외세의 진입과 이질적 문물의 유입에 따른 갈등에서도 그러하였지만, 그 보다는 일본이 원인천을 한국식민지 경영의 발판으로 삼은 데 있었다.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을 치르면서 한국에서의 우월적 지위를 확보한 일본은 우선 제물포와 한성(漢城)을 잇는 도로와 철도를 부설하고(1899) 이들과 연계되는 항만의 확장·수축에 착수하였다(1906). 그리고 이어 일본의 식량(쌀)과 공업원료 (주로 목면)를 확보하기 위한 토지조사사업(1910~1918)과 산미증식계획(1920년대), 수리조합 설립(부평수리조합 :1923) 등을 추진하였다.
인천지역사회는 이 과정에서 다른 지역에 앞서 많은 토지와 인력을 수탈당하고 대부분의 농민이 몰락하였다. 그리고 몰락한 농민은 저임금의 노동자와 가계보조적 노동인구(부녀자·아동들)를 증대시켜 조선인의 노동 여건을 더욱 악화시켰다. 인천지역사회에 통곡과 신음 소리가 가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일본은 일본인 거주지 중심으로 도시시설을 집중 투자하였고, 일본인에게 유리한 도시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다(1914). 인천지역에서는 자연스럽게 제물포를 중심으로 한 원인천사회가 그 초점이 되었다.
앞서 경기도 인천군에서 인천부로(1910) 바뀌었던 원인천사회는 이 개편에서 도시지역과 농 · 촌지역으로 양분되었다. 인천부는 일본인 시가지를 중심으로 부역(府域)이 크게 축소되고, 나머지 농·어촌지역은 부평을 중심으로 신설된 부천군 (富川郡)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각국공동조계와 청국전관조계도 모두 철폐되고, 부의 하부 행정조직도 모두 일본식[정(町), 정목(丁目)]으로 바뀌었다.
인천부는 완전히 일본인 도시로 변하였고, 전통적 인천의 중심지 역할을 잃었다.